밥할머니를 소개합니다
| 밥할머니 보존위원회
"밥할머니공원에 가보셨나요?"
우리 마을 창릉동은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마을입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과
향토문화재인 여성의병장 밥할머니 석상이 있습니다.
예쁜 연못이 만들어지면서 밥할머니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나옵니다.
비단잉어에게 먹이를 주민들도 늘어났습니다.
가끔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밥할머니는 어떤 분?'이며, '왜 석상에 머리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최근 SNS상에 밥할머니에 대한 오록이 많아
밥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합니다.
| 밥할머니 보존위원회
"밥할머니공원에 가보셨나요?"
우리 마을 창릉동은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마을입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과
향토문화재인 여성의병장 밥할머니 석상이 있습니다.
예쁜 연못이 만들어지면서 밥할머니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나옵니다.
비단잉어에게 먹이를 주민들도 늘어났습니다.
가끔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밥할머니는 어떤 분?'이며, '왜 석상에 머리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최근 SNS상에 밥할머니에 대한 오록이 많아
밥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합니다.
“왜 밥할머니라 부르게 된 것일까요?
밥할머니를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밥할머니, 고석할머니, 고속할머니, 밥보시할머니, 떡장수할머니 등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고석할머니는 오래된 돌(古石)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밥한머니, 박할머니라는 명칭도 나타납니다. 밝다’의 ‘밝’자, ‘위대하다’라는 내용의 ‘한’자를 섞어 ‘밝고 위대한 어머니’라는 뜻의
‘밝한머니’에서 밥할머니가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밥할머니’는 일종의 애칭(愛稱)으로 받아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밥을 무엇보다 중하게 여겨왔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밥은 결코 평범하거나 세속적이기 보다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밥할머니께서 자신들의 생명을 이어주는 것에 감사하며 존경하는 의미로 밥할머니라는 애칭을 만들었고, 이것이 400여 년 동안 면면히 전해져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밥할머 니의 나이가 49세였으니 아무리 수명이 짧았던 옛날이라지만 ‘할머니’ 소리를 듣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전쟁터에서 밥을 지어줘 밥할머니가 되었다.’는 주장 은 어딘지 어설퍼 보입니다. 을지문덕, 김유신, 이순신 장군 등이 활약한 수많은 전쟁에서 밥을 지워준 여성들은 무수히 많았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도탄에 빠진 이웃들에게 밥을 제공해
밥할머니로 불리었다.’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하겠습 니다.
임진왜란 이후 백성들을 구휼하고자 팔 걷고 나선 밥할머니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밥할머니는 실존 인물인가요?”
밥할머니를 설화 속 인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까지 밥할머니에 대해 확인된 역사기록을 찾아내지 못해서 그럴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여성의 존재가 역사 기록에 그 이름을 남기는 경우는 무척 드문 일입니다. 고구려의 소서노, 백제의 한주(고구려 안장왕의 부인이 된 여인), 신라의 선덕여왕(김덕만), 조선의 허난설헌(허초희) 등은 역사기록에 이름이 남아 있지만, 고려의 천추태후, 기황후, 조선의 신사임당, 만덕, 황진이, 논개, 장씨부인 등 내로라하는 여성들은 이름을 알 수가 없는 게 현실 입니다. 출세한 남편이나 아들을 둔 경우에도 여성들은 이름도 없이 본관(本貫)만 남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까요. 밥할머니 역시 남평문씨 가문에 시집을 온 ‘해주오씨’라는 신분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성 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점은 몹시 아쉬운 부분 입니다. 그렇기에 밥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해서 밥할머니를 설화적 존재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고양시에서는 ‘여성특별시 고양-H ER ST ORY10’사업을 통해 밥할머니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기록이 없더라도 밥할머니 이야기가 북한산과 창릉천 인근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고양시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노적봉밥할머니’라는 글과 악보가 실려 있습니다. ‘뛰어난 지혜로 왜군을 물리친 위대하신 밥할머니...’로 시작되는 동요입니다. ‘밥할머니의 공적을 후세에 알리려 석상을 세워 기리었죠!’라는 가사도 있습니다. 고양문화원에서는 밥할머니 인형극도 제작해 보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밥할머니를 ‘오 여사’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밥할머니 이야기는 오페라,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 인물 콘텐츠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심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이야기 소재’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밥할머니의 존재를 역사적 기록 유무로만 재단하는 것은 밥할머니의 생애의 사회적 가치, 문화적 가치, 정치적 가치를 생성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고양시는 지역에서 보기 드문 약사여래 불상이라는 점과 조선 후기 고양과 서울 은평 지역에 실존한 인물이라는 이유를 들어 2006년에 밥할머니 석상을 향토문화재 제46호로 지정했습니다.
실제로 비석에 기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바른 역사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어느 위정자의 자기중심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오히려 밥할머니 이야기의 경우는 400여 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엄청난 위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역사는 기록이 아니라 전해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구전만큼 중요한 역사 자료가 없다 하겠습니다. 구전의 위력은 그만큼 밥할머니 이야기가 선한 영향력을 지녔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거짓은 아무리 포장을 해도 그렇게 오랫동안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밥할머니 석상의 머리 부분은 왜 잘렸을까요?”
아시다시피 밥할머니의 석상은 머리 부분이 없습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을 괴롭힌 밥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훼손했다고 합니다. 망치로 부쉈다고도 하고, 일본칼로 잘랐다고도 합니다. 한편 숭유억불 정책을 취했던 조선시대에 일어난 일이라는 이야기도 가능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전혀 개연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현대에도 광신적인 타 종교인들이 불상이나 단군상을 훼손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밥할머니 석상의 머리 부분은 일본인들이 훼손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밥할머니 석상의 머리를 훼손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혹시 모를 저항의 싹을 자르고자 했을 수 도 있으니까요.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정기를 끊고자 곳곳에 쇠 말뚝을 박았잖습니까.
창릉동주민자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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